발렌티노 런웨이를 깨진 거울로 연출한 예술가, 알프레도 피리

아티스트


발렌티노 2025 S/S 런웨이 현장



8년간 #구찌(@gucc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명성을 쌓은 #알레산드로미켈레(@alessandro_michele)가 2025 S/S를 맞아 #발렌티노(@maisonvalentino)에 부임한 뒤 첫 런웨이를 선보였습니다. 유구한 세월 쌓아온 발렌티노의 고전미에 그만의 터치가 더해진 컬렉션이었는데요. 깨진 거울 바닥이 미켈레 특유의 기이한 분위기에 기여했죠. 이 바닥을 연출한 이는 이탈리아의 예술가 #알프레도피리(@alfredo_pirri). ‘파씨(Passi)’라고 불리는 거울 바닥은 그의 시그니처로, 전작에서도 꾸준히 변주를 거듭해 왔는데요. 모티프의 반복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육안으로 드러나는 변화와 숨겨진 맥락을 읽으면 작품을 보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알프레도 피리의 <Compagni e Angeli>



2024년 여름 치타 산탄젤로(Citta Sant’Angelo)의 박물관에 설치된 피리의 작품 <Compagni e Angeli>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 대한 헌사입니다. 그람시는 파시즘에 저항하던 중 무솔리니 암살을 죄목으로 20년형을 선고받는데요. 그는 투옥된 10년간 손에 들어온 간행물은 모두 읽으며 무려 2,848쪽에 달하는 필사본을 남겼습니다. 기존 공산주의가 자본가들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그람시는 노동자 스스로 판을 이끄는 정치경제적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죠. 피리의 작품에서는 각기 다른 컬러의 메타크릴레이트 벽과 거울 바닥이 눈에 띕니다. 벽 안에 갇힌 거위의 털과 깨어진 거울 바닥은 그람시의 부자유한 인체를 연상시키는 반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고 번지는 색색깔의 빛은 그의 환한 지성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쿠르살 산타루치아 꼭대기층의 살라 시엘로



지난 2021년 재단장을 마친 아르누보 스타일의 극장 쿠르살 산타루치아(Kursaal Santalucia)는 꼭대기층의 살라 시엘로(Sala Cielo)로 화제를 낳았는데요. ‘하늘의 방’이라는 뜻의 이곳은 피리의 손을 거치며 바다와 면한 극장의 특색을 십분 살린 명상적 공간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새벽부터 황혼까지 색조를 바꾸는 하늘과 바다빛이 홀 내부를 물들이는 것이 특징. 다중 투명막재 ETFE 소재에 빗방울의 동심원 형태를 디지털 프린트한 천장은 그 자체로 물의 반영처럼 보이죠. 이곳에 발을 들인 누구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알프레도 피리의 <파씨> 씨리즈



피리의 거울은 극장에서는 하늘과 바다를 뒤섞는 팔레트였다가, 박물관에서는 불굴의 정신으로 노동자의 삶을 지지했던 인물을 향한 존경으로 나타납니다. 발렌티노 쇼가 끝난 뒤 미켈레는 “많은 이들이 삶을 두려워하는 이상한 시대”라며 “젊은이들은 인생을 축복하도록 돌아와야 한다”고 밝혔는데요. 런웨이의 거울은 깨어지고 부서져도 용기 있게 세상 밖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일까요. 혹은 나아갈수록 부서질 수밖에 없는 자아에 대한 역설일까요. 깨진 거울 위에 또 다른 물음표를 던져봅니다.


Editor. 성민지

Image. Valentino, Alfredo pir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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