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을 부르는 해변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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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리카르도 보필(Ricardo Bofil)이 1973년 스페인 칼페에 완공한 라 무랄라 로하(La Muralla Roja)를 처음 보면 실재하는 주택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스포이트로 빼온 듯한 분홍빛 주택이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풍경이 비현실적이거든요. 하지만 이 주택은 원룸에서 침실 2개, 침실 3개 등 다양한 구성의 집 50채를 갖춘 엄연한 거주지입니다. 놀랍게도 에어비앤비에서 예약 가능한 객실도 있고요.





해당 주택은 이슬람식 요새인 카스바(Kasbah)를 닮았는데요. 외부의 침범에 무장한 외관과 함께 무더운 열기를 차단하는 좁다란 창문이 눈길을 끕니다. 한편 건물의 이름은 스페인어로 ‘붉은 벽’을 뜻하지만, 그 색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건물 외벽은 빛에 따라 핑크에서 선홍빛으로, 다시 짙은 벽돌빛으로 변모합니다. 반면 위를 향하는 계단과 옥상 등은 연한 블루로, 이 역시 기상 상황에 따라 창백한 회백색과 맑은 하늘빛으로 표현되죠.





위에서 내려다본 건물은 계단이 맞물리는 형태에서 환각적 드로잉으로 유명한 에셔의 그림을 겹쳐 보이게 합니다. 이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세트장과도 닮아 화제가 되었는데요.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공간이 탈출 불가능한 폐쇄회로에 가깝다면, 무랄라 로하는 내향적이지만 상냥한 미로에 가깝습니다. 현관을 나서면 계단을 2바퀴는 돌아야만 이웃집에 도달하는 구조, 건물 안으로 움푹 들어간 현관 등은 온전히 밖에 나오기 전 숨을 고르는 여유를 주죠.





폭 1m가 채 안 되는 복도가 5층 높이로 풀어진 이 아파트에는 유희적 요소가 가득합니다. 이를 알아본 스웨덴 카메라 브랜드 핫셀블라드(hasselblad) 사이트에는 숨바꼭질을 컨셉으로 한 사진작가의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는데요. 온종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며 계단을 오르거나, 숨바꼭질과 보물찾기를 할 수 있는 곳. 이곳에서는 시계도 필요 없습니다. 해지는 동선에 따라 드리워진 그림자가 귀가할 시간을 알려줄 테니까요.


∙ 라 무랄라 로하(La Muralla Roja)

∙ Partida Manzanera, 3A-14 03710 Calpe, Marina Alta(MA), Spain


Editor. 성민지

Image. 리카드로 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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