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지 않으면 흘러가는 것들. 심종희 작가의 영감

인터뷰


우연한 계기로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사용한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특별해지기도 하죠. 작품이 좋아서 작가가 궁금해지거나, 작가가 좋아서 작품이 좋아지거나. 순서가 어떻든 상관없어요. 작가의 취향을 알고 나면 그의 작품도 새롭게 다가올 거예요.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지. 작가로서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심종희 작가는,


흘러가는 순간의 기억들을 붙잡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을 선을 통해 정리하면서 비로소 완전해짐을 느낀다는 심종희 작가. 기억하는 동시에 망각하는 우리 기억의 불완전함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해서, 끝없이 선을 긋습니다.



작가 사진. 2022년 개인전 긴 호흡으로 전시장에서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찰나의 순간은 선으로 표현됩니다.


‘선’은 베이직한 표현 방법이면서 한편으론 자유롭게 변주와 확장이 가능한 요소가 많다는 점이 매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선을 긋는다’라는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행위도 제가 추구하는 작업의 방향성과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모두에게


Q1. 선으로 작업을 하시는데, 선을 그을 때 굉장히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반복적으로 선을 긋다 보면 도를 닦는달까요, 경지에 다다를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마음이나 생각으로 집중하려고 노력하시나요? 특히 몰입에 도움이 되는 루틴이 있나요?


반복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수행자 또는 노동자의 마음으로 집중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예술노동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집중이 잘 되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고요함만 남는데, 그 오롯이 개인이 되는 순간이 좋습니다. 저는 집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자칫 루즈 해지기 쉬워서 자리에 앉으면 핸드폰은 뒤집어 놓고 잔잔한 노래를 틀고 작업합니다. 선 긋는 작업을 하다 보면 잔상이 남아서 눈이 쉽게 피로해져 짧게 쉬어가며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하루에 몇 시간 작업해야지-라는 생각보단 그날의 할 일 체크리스트를 짜고 하나씩 클리어하는 방식이 잘 맞습니다.



2018년 작업실에서


Q2. 작가님의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추상 표현된 공간은 보는 이들도 자신의 기억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만의 공간이기도 하면서도 모두의 공간이 된달까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요?


제가 그리는 것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기억이지만 그걸 모두 보여주진 않습니다. 작품에는 알듯 모를듯한 어렴풋한 풍경만 남게 됩니다. 제가 기억에 관해 그리는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변화하고, 또 그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더 확장되고 각자의 해석의 여지가 남는 것이 기억의 특성과 일맥상통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은 각자의 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만의 취향과 생각을 담고 매일 밤을 보내는 네모난 공간이요.



<모르는 방>, line tape on canvas, 22.7 x 15.8cm, 2017



<모르는 방>, line tape on canvas, 22.7 x 15.8cm, 2017


기억의 실마리


Q3. 공간 외에도 불쑥 우리의 기억을 꺼내는 '버튼' 같은 것들이 있는데요, 향이나 질감 같은 것이요. 요즘 작가님을 사로잡은 버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자주 꺼내보는 물건이나, 자꾸 생각나는 기억이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요즘 제 버튼은 따스한 햇살입니다. 3월이 되었어도 아직 추워서 빨리 겨울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 해는 조금씩 길어지고 햇살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그 햇볕 아래 서있으면 따뜻하고 좋았던 기억들만 떠오릅니다. 따릉이를 타고 가까운 한강에 가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며 앉아있던 그런 기억들이요.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2년 여름의 한강



2021년 가을의 한강


Q4. 작가님이 '존재'와 '기억'에 대한 주제에 몰두하게 된 계기나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종종 세상에서 조금 붕 떠있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느낌? 그 불안함을 잠재우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데자뷔를 자주 느껴서 순간 제 기억을 의심하게 되거나 주변의 친구나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함께했던 순간들을 미묘하게 다르게 기억한다거나 하는 사건들이 모여서 기억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고민이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의 주제와 관련은 없지만 작업자로서 늘 마음을 다잡게 되는 글을 공유하고 싶어요.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일부분인데 자주 들여다보는 구절이에요.



신경숙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나를 둘러싼 것들


Q5. 요즘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미지가 있나요?


언제나 매력적인 것은 제가 사는 도시의 풍경입니다. 흔히 회색빛 도시로 표현되는 서울이지만, 번화한 대로변의 거대한 구조물이나 구도심의 빼곡하게 붙어 들어선 건물과 골목길. 그 속에 이야기가 가득하게 느껴져 삭막하기보단 흥미롭습니다.


다른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이기봉 작가님의 작품이요. 학부시절 교수님이시기도 해서 작년 연말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동기들과 함께 갔었는데 거대한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깊은 예술세계에 감동하고 왔습니다. 특히 <Black Mirror> 연작들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또 평소 이미지보단 글자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편입니다. 작업을 하다가 어떤 단어가 생각나면 사전적 의미를 검색하고 거기서 작업의 방향성을 잡는 식이에요. 요즘엔 기억의 속도, 균형, 중심 잡기 등에 대해 생각합니다.



작업실에서 보이는 풍경


Q6. 작업할 때 자주 듣는 음악 몇 곡 추천해 주세요.


작업할 때는 집중하기 위해서 유튜브로 잔잔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아서 틀어 놓는 편인데요, 사실 평소 음악 취향은 조금 다릅니다. 좋아하는 노래가 많아서 몇 개만 추리기가 힘드네요. 장르를 딱히 가리진 않지만 주로 모던 록을 선호하는데 요즘엔 너드 커넥션, leisure, 요안 르모앙, 이매진 드래곤스 많이 듣습니다. 뭔가 좋다 싶으면 그 가수 노래를 전체 재생해서 듣는 스타일입니다. 밴드 넬의 오랜 팬이기도 합니다.



(좌) 이매진드래곤스 앨범커버 ©유튜브뮤직
(우) Leisure 앨범커버 ©유튜브뮤직


기억을 담은 공간에 대하여


Q7. 어떤 공간들이 주로 기억에 남는 편인가요? 우리 기억 속에 오래 머금게 되는 공간은 어떤 공간일까요?


오감이 다 만족스러운 순간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다 같이 웃음이 터질 때, 혼자 찾은 전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했는데 마침 이어폰에서 딱 알맞은 노래가 나오는 순간, 그럴 때 ‘아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뻔한 대답이지만, 결국 순간의 행복을 느꼈던 공간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좌) <기억의 밀도_drawing61>, 30x30cm, 종이에 펜, 2021
(우) <기억의 밀도 drawing15>, 30x30cm, 종이에 펜, 2019


Q8. 작가님의 작품은 어떤 공간에 걸렸을 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전통적인 화이트큐브 공간을 선호합니다. 깔끔하고 정적이고 작품을 차분하게 관찰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진 공간이요. 반면 기억의 밀도_drawing 액자들은 왠지 모르게 해가 잘 드는 가정집 주방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 작업이 흑백으로만 이루어져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 그 안에 따스함과 온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공간에 제 그림이 걸린 풍경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억의 밀도 drawing 액자들


Q9. 마지막으로, 작업의 소재가 되었던 공간들 중 실제로 가보면 좋을 곳 1-2곳 정도 추천해 주세요!


제 작업 속의 공간들은 모두 실제로 제가 갔던 공간들이지만 작품 제목이나 설명에 구체적으로 적어놓지는 않습니다. 작업을 위해 수집하는 공간 이미지는 개인적인 공간들도 있고 여행에서 만났던 공간들도 있지만 갤러리나 미술관이 많습니다.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느껴지는 안온함을 좋아하고 일반 건물과 다른 구조적인 형태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자주 방문하게 됩니다.


햇살 좋은 날 서울 시립미술관 3층에서 입구 쪽을 바라보는 걸 추천합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원형전시실을 지나 마주친 통로가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심종희 작가가 그리는 공간은 보는 이의 내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습니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마는 일상 속에서 우연히 마주칠 ‘너무 좋아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소소한 나만의 감성을 깨워주는 작품들입니다. 작가의 기억처럼 봄기운 속에서 한강의 햇볕 아래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그의 취향이 담긴 책과 음악도 함께요. 심종희 작가의 작품은 난트 웹사이트에서 감상 및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심종희 작가 페이지 바로가기


심종희 작가의 영감상자


  • 신경숙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 모던록 장르 -  너드 커넥션, leisure, 요안 르모앙, 이매진 드래곤스, 넬
  • 요즘 생각하는 것 - 기억의 속도, 균형, 중심 잡기
  • 이상적인 공간 - 자신만의 취향과 생각을 담고 매일 밤을 보내는 네모난 공간, ‘각자의 방’
  • 공유하고 싶은 공간 - 햇살 좋은 날 서울시립미술관 3층 입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원형전시실을 지나 마주친 통로
고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