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에르메스의 역사를 만든 스타일 아이콘, 제인 버킨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가방을 탄생시킨 여자
: 에르메스의 역사를 만든 스타일 아이콘, 제인 버킨
어떤 만남은 한 분야에 전에 없던 역사적 장면을 남깁니다. 이는 꼭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국한하지 않죠. 자신의 개성을 아는 한 사람과 브랜드의 만남이 예인데요. 앙상한 몸으로 속이 훤히 비치는 니트 원피스와 청바지를 오가며 장신구를 가득 단 몇 천만 원 짜리 버킨백을 가득 채운 채 거침 없이 파리를 거닐던 제인 버킨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방을 탄생시킨 인물이죠. 서로가 만남으로써 풍요로워진 예술세계, 세 번째는 제인 버킨과 에르메스입니다.
2023년 7월 16일, ‘프렌치 시크’의 전설인 제인 버킨은 76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표현을 빌리면 그녀는 가죽에 이름을 새긴 인물이죠. 생전 그녀가 들었던 버킨 백은 한화 13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는데요. 그녀의 이름을 딴 버킨 백은 웬만한 직장인 연봉에 육박하지만, 돈이 있다고 살 수도 없는데요. 에르메스는 고객과의 꾸준한 관계도 중시하거든요. 장인 한 명이 가방 하나를 완성하는 데 많게는 48시간 이상 드는 만큼 수량 자체도 제한적입니다.
제인 버킨(Jane Birkin)와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버킨 백은 시작부터 드라마였습니다. 1984년, 한창 아이를 키우던 제인 버킨은 런던행 비행기를 탑니다. 바로 옆 자리는 에르메스 CEO인 장 루이 뒤마였죠. 항상 보부상 마냥 짐이 많던 제인은 평소 들던 라탄 바구니를 그의 앞에서 쏟게 되는데요. 더 큰 가방이 필요해 보인다는 장 루이 뒤마의 조언에 그녀는 기내에 비치된 멀미 봉투를 꺼내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이 꼭 갖고 싶어 하는, 수납공간이 넉넉하고 짐을 찾기 좋은 가방을요. 그렇게 그녀의 손끝에서 구상된 가방은 에르메스에서 구현됩니다. ‘버킨 백’으로요.
내 이름을 딴 값비싼 가방을 선물 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대개 부는 행동을 바꿉니다. 물건은 떠받들어야 할 우상이 되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러움을 잃죠. 제인은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녀는 버킨 백 손잡이에 까르띠에 시계를 걸고, 몸통에는 각종 스티커를 붙이거나 소지품을 장식했습니다. 가방은 그녀의 취향과 관심사를 보여주는 장이 됐죠. 무엇보다 그녀는 여전히 짐을 넘치게 담았습니다. 훤히 입을 벌린 가방 입구는 곧 그녀의 생활이었죠.
제인 버킨의 삶은 사실 ‘스타일 아이콘’이라는 수식 외에는 말끔히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건 18살 연상인 당대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 겸 가수인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연애였는데요. 두 사람이 함께 부른 노래 <Je t’aime… Moi non plus>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을 연상시키는 곡인데요. 발매 당시 성 해방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프랑스에서도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밤 11시 이후에만 틀도록 허락됐습니다. 두 사람은 이 곡을 단골 식당에서 처음 틀었는데요. 그 순간 식당 전체에 긴장감이 깃든 정적이 흘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이 노래는 세르주와 제인의 듀엣곡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죠.
한편 세르주는 제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알코올 홀릭이기도 했는데요. 제인은 1980년에 쓴 에세이 <멍키 다이어리>에서 ‘더는 명령받지 않는 삶을 원한다’며 ‘세르주는 내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12년간의 결혼 생활을 뒤로 하지만, 이후에도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남죠. 1991년 사망 전까지 세르주가 제인을 위해 쓴 곡이 이를 말해주죠. 제인은 한 인터뷰에서 ‘세르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진 않은지’ 묻는 질문에 샹송의 시인인 그가 25년간 자신을 위해 곡을 썼다는 사실은 짐이 아닌 은총이라고 강조합니다.(1) 제인의 삶은 연인과의 만남에서 힘겨웠던 순간과 선물 같은 순간을 모두 담는 모순 자체죠.
그녀는 ‘뮤즈’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활약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자발적 수동성이랄까요. 그녀는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세르주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기뻤다고 밝힙니다. 누드 사진 촬영도 즐거웠다고 덧붙이죠. 그녀는 자신이 세르주와 대중의 욕망의 대상이었고, 그게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였음을 인정합니다.(2) 대중이 그녀를 욕망한 만큼 그녀 역시 욕망되길 바랐죠. 제인은 시대가 바뀐 지금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다며 거리를 둡니다. 세상의 욕망도, 한 사람의 욕망도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같은 사람이라도 내면의 응답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테죠.
영국의 유명 배우 제인 버킨의 이름을 따서 만든 에르메스의 가방 버킨백
제인은 에르메스에 ‘버킨 백’ 이름값으로 연 4만 달러에 달하는 로열티를 받음에도 자신의 가치를 우선했습니다. 그녀가 PETA의 악어 착취 영상을 보고 에르메스에 서한을 보낸 사건은 유명한데요. 제인은 버킨 백 제작 공정을 개선하기 전까지 ‘버킨 백’이라는 이름 사용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에르메스 입장에서는 그녀의 청원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에르메스는 브랜드의 공정이 멸종 위기에 처한 개체 보호에 관한 UN 기준에 부합한다고 해명합니다. 당장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데도 문제를 제기한 스타와 소명할 의무가 없음에도 스타의 목소리를 경청한 일화는 이야기를 됩니다. 한 인간의 품성과 그저 자본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브랜드의 서사를 말이죠.
버킨 백을 구매하는 이들은 제인 버킨의 삶을 탐냅니다. ‘대체불가한 고유한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이죠. 그러나 어떤 상품을 구매하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본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인 버킨이 스타일 아이콘이 된 까닭은 그녀만의 인생을 만들어 감에 있었으니까요. 제인의 다채로운 면모는 그녀가 세상과 접촉한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자극을 반사하고, 굴절시키고, 흡수한 인생은 그럴듯한 카피라이팅 한 줄로 담아낼 수 없죠.
생전 제인은 인생에서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고, 그때야말로 흥미로운 일이 시작된다”고 전한 바 있죠.(3) 제인의 매력은 한 치 앞의 국면을 어떻게 마주할지 주목하게 하는 힘에서 나온 게 아닐까요. 자신의 욕구를 인정하는 솔직함과 세상의 부름에 응답하는 당당함의 결합이 어떤 단어로도 해체되지 않는 아이콘을 만든 거죠.
*인용 및 참고
(1) Jane Birkin: “The important things in a woman’s life happen at 40”, Swisslife Blog, September 23th, 2019
(2) 'I was a kind of object and that's what I wanted to be': Jane Birkin, from 1969 to #MeToo, LeMonde, July 18th, 2023
(3) Jane Birkin, actress, singer and style icon, has died at 76, Happer’s Bazaar, July 17th, 2023
Editor. 성민지
Image. Getty Images, Sotheby’s, Her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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