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빈티지 도자기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빈티지 도자기
: 미안해, 사과는 안 할 거야(SORRY, I WON'T APOLOGIZE)
요리를 즐기시나요?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매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요리 역시 지루한 일일 텐데요. 요리를 포함한 가사노동은 결과물도 흔적도 남지 않는 특성을 지니죠. 요리 이후의 식사는 하루 중 허기를 채우고, 맛을 음미하고, 식구와 정담을 나누는 시간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대화 하나 오가지 않는 시간이라면 그저 갑갑하고 헛헛한 순간일지 모르죠.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Marie-Claude Marquis)의 장식용 접시 아트피스
캐나다 몬트리올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marimarki)는 18~19세기풍의 빈티지 도자기에 도발적인 문구를 그려냅니다. ‘미안해, 사과는 안 할 거야(SORRY, I WON’T APOLOGIZE)’, ‘미안한데 관심 없다(Sorry, I lost interest)’. 장식성이 두드러지는 꽃 세밀화에 목가적 일러스트, 도금처리된 테두리는 호사스럽지만, 그 위에 쓰인 타이포그래피는 사회적 관습에 비춰볼 때 무례하기 그지없죠.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Marie-Claude Marquis)의 장식용 접시 아트피스
작가의 작품 속 타이포그래피는 지나친 솔직함으로 두 눈을 비비게 합니다. 식사 분위기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 관례 하에 목구멍으로 삼킨 말들이 빈 그릇 위에 자리하죠. 그녀의 작품은 문장 하나로 무사안일식 평온을 깨부수며 파경을 연출합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I don’t really care what happens here)’는 씁쓸함을, ‘제정신 유지하기 힘드네(IT’S HARD TO STAY SANE)’은 힘든 하루를 보낸 어느 날의 속내를 반영합니다.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Marie-Claude Marquis)의 장식용 접시 아트피스
작품을 보노라면 가사노동의 비가시적 성격을 짚고 갈 수밖에 없는데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뱃속으로 들어가면 사라집니다. 설거지를 마친 부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앉아있는 창백한 그릇을 보일 뿐이죠. 음식물과 세제로 범벅된 싱크대, 먹다 남은 음식물이 퍼질러진 식탁은 금세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화려한 접시 위 자리한 굵은 서체는 무수한 가사노동 중 새겨지는 감정적 이력을 분명하게 환기시키죠.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Marie-Claude Marquis)와 그의 작품
‘전기나 가스 요금 고지서를 이십 년 동안 보관하기도 하는 이유는 그저 시간을 기록해 두고 싶어서, 자신들이 해낸 일을, 자신들이 살아낸,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 시간을 기록해 두고 싶어서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에세이 <물질적 삶> 중 「집」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먹어치운 그릇 아래 자리한 그날의 기분을 적는 마리 클로드 마르퀴스의 작업. 어쩌면 풍성한 요리 아래 깔린 마음은 납작한 슬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용: 마르그리트 뒤라스 <물질적 삶>, 윤진 역, 민음사, 2019
Editor. 성민지
Image. 작가 인스타그램